EPISODE 1. 저주받은 재능과 종말의 서막
기억이 바래면 존재가 스민다.
그것은 현대 과학이 증명하지 못하는 이 세계의 유일한 법칙이었다.
인류의 집단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신화, 전설, 혹은 민담. 그 희미해진 서사(敍事)의 찌꺼기들이 현실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와 기이한 현상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화 재해’라 불렀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서울 한복판에서 새로운 재해가 움트고 있었다.
“젠장…!”
욕설과 함께 거친 숨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보고해, 현 상황은?”
통제 차량 안에서 차분하게 상황을 묻는 목소리의 주인은 지원팀장인 이수연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전방의 거대한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스크린 속에는 야간 투시경으로 본 듯한 녹색 시야가 위아래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치직… 현장 요원 세 명, ‘오염’ 확인. 전투 불능!] [놈의 본체를 식별할 수 없다!]
무전기 너머로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전자기기가 전부 미쳤어! 드론도 통제 불능 상태다!]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잠시 끊겼다가, 이내 처참한 광경을 비췄다. 용산 전자상가. 한때 온갖 최신 기기들로 불야성을 이루던 곳은 이제 거대한 폐허나 다름없었다.
상가 건물에서 뜯겨 나온 수백, 수천 개의 폐모니터와 컴퓨터 본체들이 기괴한 탑을 이루고 있었다. 탑의 표면에서는 수십 년 전의 흑백 광고와 빛바랜 뉴스 화면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버려진 핸드폰들이 메뚜기 떼처럼 날아다니고, 폐급 그래픽카드들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바닥을 기어 다녔다.
“일본 민속학팀에 자문 요청은?”
수연이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츠쿠모가미(付喪神)’의 일종으로 추정된다는 답변뿐입니다.] [오래된 물건에 영혼이 깃들어 요괴가 되는… 아시다시피 너무 광범위한 개념이라.]
“결국 원인을 모른단 소리군.”
수연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츠쿠모가미. 일본의 잊혀진 민담 속 존재. 그것이 지금 서울의 전자상가에서 수많은 폐가전제품을 집어삼키며 강철의 괴물로 거듭나고 있었다.
[팀장님! 탑이… 탑이 움직입니다!]
요원의 경악 어린 외침과 동시에, 폐가전의 탑이 지축을 울리며 몸을 일으켰다. 수많은 모니터가 일제히 하나의 눈동자처럼 번뜩였다. 그것은 분노에 찬 시선이었다. 자신들을 잊고 버린 인간들을 향한 원망과 저주.
[크아아아아아—!]
모니터 스피커에서 터져 나온 불협화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현장 요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이 재해의 ‘이야기’를 파훼하지 못하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였다.
수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현장 통제권, 지금부로 이관한다.” “알파 팀, 즉시 투입해.”
그녀의 결정에 통제실의 모든 요원들이 숨을 죽였다. 알파 팀. 신화재해처리반(MDRT) 내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위험한 재해에만 투입되는 해결사.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단 한 명의 남자가 있었다.
“그 사람, 도착했습니까?”
한 요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연은 대답 대신 턱짓으로 통제실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닳아빠진 검은색 코트,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미간, 그리고 세상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는 듯한 공허한 눈동자.
MDRT의 에이스, 한지한이었다.
“상황은.”
그가 내뱉은 첫마디는 질문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일본산 츠쿠모가미. 발현 규모는 B급이지만, 아직 본체 특정이 안 됐어.”
수연이 브리핑했다. 지한은 대답 없이 스크린 속 괴물을 노려봤다. 그의 눈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의사가 환부를 살피는 것처럼,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이었다.
신화(神話). 인류가 외면하며 짊어진 원죄. 지한에게 그것은 구원도, 신비도 아니었다. 그저 지긋지긋한 역병이자, 반드시 박멸해야 할 오물일 뿐.
“5분.”
지한이 짧게 말했다.
“5분 안에 끝내지.”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망설임 없이 통제 차량의 문을 열고 재해의 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제집 안방에 들어가는 것처럼 태연한 걸음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한지한은 수많은 폐가전이 날뛰는 아수라장의 한복판에 섰다. 사방에서 쇳소리와 파열음이 울렸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아.”
짧은 한숨과 함께 지한의 눈빛이 변했다. 순간, 그의 시야에 들어온 세상이 기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색이 빠져나가고 흑백의 노이즈가 화면을 채웠다. 사물들의 경계선이 무너져 내리고, 그 자리에는 무수한 실선이 나타났다. 마치 세상이라는 거대한 태피스트리의 날실과 씨실이 드러난 듯한 광경.
‘신화 서사 가시화’. 이것이 바로 한지한의 능력이었다.
모든 신화 재해는 고유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현실에 강림한다. 지한은 그 이야기의 흐름, 즉 서사의 구조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 전개, 절정, 그리고 결말까지.
그의 눈에 비친 폐가전의 탑은 그저 고철 덩어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서사의 실타래가 엉겨 붙어 만들어진 거대한 매듭이었다. 버려진 자들의 원한, 잊힌 자들의 슬픔, 낡은 것들의 분노.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 하나의 저주가 된 결과물.
“너무… 시끄럽군.”
수백, 수천 개의 이야기가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미쳐버렸을 정보의 홍수. 하지만 지한은 익숙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시선은 엉킨 실타래 속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가장 굵고, 가장 질기며,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이 된 단 하나의 ‘근원 서사’를 찾기 위해서.
그때였다. 지한의 존재를 눈치챈 츠쿠모가미가 분노했다. 거대한 폐가전의 탑이 그를 향해 육중한 팔을 휘둘렀다. 수십 톤에 달하는 고철 덩어리가 대기를 찢으며 날아왔다.
피할 수 없는 공격. 하지만 지한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서사의 심연을 향해 있었다.
‘…찾았다.’
마침내, 그의 눈동자에 하나의 실이 또렷하게 비쳤다. 다른 실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오래되고 빛바랜, 하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은 단 하나의 이야기.
[나를 기억해 줘.] [내가 처음으로 음악을 들려주었던 그 순간을.] [너의 첫 번째 기쁨이 되었던 나를… 잊지 말아 줘.]
애틋하고 서글픈 이야기였다. 한 소년이 생애 처음으로 자신만의 ‘마이마이 카세트 플레이어’를 선물 받고 기뻐했던 추억. 그 플레이어가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인을 그리워하며 간직해 온 단 하나의 이야기.
그것이 이 재해의 핵, 본체였다.
“거기 있었나.”
지한이 나직이 읊조렸다. 그 순간, 그의 바로 머리 위까지 날아왔던 고철 팔이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멈췄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었다.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지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거대한 탑이 무너져 내렸고, 광란하던 폐가전들이 잠잠해졌다.
그는 무너진 고철 더미의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낡고 녹슨 카세트 플레이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먼지 쌓인 플레이 버튼 위에는, 오래전 소년이 서툰 솜씨로 붙였을 강아지 스티커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너의 이야기는 이제 끝났다.”
지한이 차갑게 선언했다. 그의 손아귀에서,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가 바스러져 한 줌의 먼지가 되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었다.
재해의 근원 서사가 파훼되자, 용산 전자상가를 뒤덮었던 기괴한 현상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아… 하아…”
능력을 해제한 지한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리고,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어김없이 ‘그것’이 찾아왔다.
‘부작용(副作用)’.
[…기뻐. 네가 처음으로 내 버튼을 눌렀을 때, 난 정말 기뻤어.] [왜 나를 버린 거야?] [돌아와 줘.] [다시 한번, 너의 목소리를 들려줘…]
방금 전 소멸시킨 츠쿠모가미의 감정이, 기억이, 원념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신화에 동화되는 현상. 서사를 읽는 대가로, 그 서사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끔찍한 저주였다.
“닥쳐.”
지한은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을 헤집는 낡은 요괴의 슬픔을 억지로 짓눌렀다. 이 감정에 잠식당하는 순간, 자신 또한 저 괴물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릴 터였다.
증오스럽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신화라는 것들이. 그리고 그것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마저도.
그때,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어폰에서 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지한 요원? 상황 종료된 건가?]
“그래.”
지한은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대답했다.
“보고서 올릴 테니, 뒤처리는 알아서 해.”
용건을 마친 그는 곧바로 통신을 끊어버렸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역겨운 신화의 잔향이 가득한 이곳에서, 단 1초도 더.
코트 깃을 세우고 막 현장을 떠나려던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다시, 이어폰에서 다급한 호출이 울리고 있었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긴박하고 절박한 목소리였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반복한다, 전 요원에게 알린다! 코드 블루 발생!]
지한의 미간이 좁혀졌다. 코드 블루. 국가 멸망급 재해를 의미하는 최악의 경보였다.
[노르웨이 해상에서 ‘요르문간드’의 서사 반응 감지!] [전조 현상으로… 한강 전역이 급속도로 결빙 중이다!]
라그나로크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뱀. 잊혀진 북유럽 신화의 종말이, 지금 서울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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